라벨이 김종서 음역대인 게시물 표시

하현우 (국카스텐) 복면가왕 9연승, 가창력과 밴드, 이카타

국카스텐 하현우 음악대장 (복면가왕)  "국카스텐할 때 저희는 스스로 불량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또래 애들은 다  여행가고 하는데 나는 왜 공사 현장에서 먼지를 마셔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나 세상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그래서 세상 다 부숴버리자 그런 말을 했고 합주하면서도 분노의 대상을 찾았다.  어릴 땐 멋모르고 세상이 우릴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너무 불평등한 것 같고 그랬다." 첫 솔로 미니앨범 발매 (Ithaca 이카타) 기념 감상회에서 하현우가 한 말이었습니다 첫 밴드활동 처음 밴드활동 할 때 패배주의와 분노, 화로 가득했었다고 합니다.  하현우는 이카타를 막연히 동경해왔는데 '이카타로 가는 길'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적 구상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하현우는 고등학생 때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노래방에서 연습을 했는데 'She's Gone'을 불러 열광적인 환호를 받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서 음악을 포기하고 화가가 꿈이셨던 어머니에 의해 미대로 진학을 했다고 합니다.  신인을 꿈꾸기도 했었다고 하죠.  하현우는 대학교 근처 수퍼 앞을 지나가는데 "혹시 음악 좋아하세요? 노래 부를 줄 아세요?  스쿨밴드하는데 펑크 음인데 노래 잘 못불러도 돼요"라며 말을 걸어와 대학 스쿨 밴드 오디션을 거쳐 보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제대로 된 음악인으로서의 인생을 걷고 싶어 자퇴서를 내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하현우는 홍대의 인디씬에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생계가 어려워 음악 활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으며 의상 관련 일로 진로를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밴드의 꿈을 놓지 않은 하현우는 강원도에서 1년 반 동안 합숙하며 당시 생계를 위해 밤에은 실내포차 '천둥 벌거숭이'에서 일하고 낮에는 미친 듯이 곡을 만들어 공연을 하며 1집 앨범을 탄생시켰습니다. 국카...

김종서 노래 데뷔 부활과 시나위 앨범발매

이미지
  김종서 초고음역대 가창력 와인깨기 초고음역대의 보컬로 락의 전설로도 통하는 김종서는 1987년 시나위 2집 앨범으로 데뷔를 하여 90년대 락 발라드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아직도 건강한 목소리와  가창력을 잃지 않은 가수입니다. 김종서 김종서는 고교 졸업 수 첫 밴드 생활을 시나위에서 했으나 해고되고 난 후 목에서 피비린내가 날 정도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제법 유명세를 타던 언더그라운드 시절 'Black Dog'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부활의 전신인 'The End'의 보컬 자리를 제안한 김태원과 부활을 결성하게 됩니다.  김종서는 앨범 발매와 매니저와의 문제로 부활을 탈퇴하고 여러 밴드를 거치다가 시나위 2집에 참여하여 첫 앨범 '새가 되어가리'가 대히트를 치지만 카리스마(유현상)라는 밴드에  합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락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가고 김종서는 카리스마에서 탈퇴를 하여 시나위 4집 앨범에 참여를 하였으나 신대철과의 갈등으로 서태지와 동반 탈퇴를 하였습니다.  1992년에는 솔로 데뷔곡인 '대답없는 너'가 대히트를 치고 '지금은 알 수 없어', '아름다운 구속', '플라스틱 신드룸', '겨울비' 등 발매하는 음악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록 음악의 침체기에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김종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곡에 피처링을 하였고 'Free Style'이라는 곡은 김종서와 서태지가 공동으로 작사, 작곡을 하여 김종서 4집과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 각각 수록하였습니다. 예능계 다양한 활동 2000년대에는 예능계에도 진출하여 여러 예증 프로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2008년 SBS 드라마 '행복합니다'에 출연하여 연기자에도 도전을 하기도 하였죠.  김종서는 40대에 접어들어서 호흡 조절 문제로 성악을 배우기도 했는데 방성법을 터득해 성량이 더욱 풍부해졌습니다.  2014년에는 불후...